정부기록물과 박물관 소장 자료, 신문사 데이터베이스에 잠들어 있는 빛바랜 사진들을 열어 봅니다. ‘사-연’은 그중에서도 ‘길’, ‘거리’가 담긴 사진을 중심으로 그곳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연재입니다. 거리의 풍경, 늘어선 건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 등을 같은 장소 현재의 사진과 이어 붙여 비교해볼 생각입니다. 사라진 것들, 새롭게 변한 것들과 오래도록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과거의 기록에 지금의 기록을 덧붙여 독자님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해당 장소에 얽힌 ‘사연’들을 댓글로 자유롭게 작성해 주세요.
윤중제가 완공된 여의도, 이 텅 빈 허허벌판에는 서쪽에 국회의사당이 들어올 것을 제외하고는 구체적인 개발 계획이 없었습니다. 김현옥 시장은 여의도 80만평의 부지에 도심의 핵심 기능을 이전해 ‘제2의 서울’을 건설할 계획을 세웁니다.
실현되지 못한 꿈, 김수근의 ‘여의도 계획’
1960년대 말, 국가 주도의 대규모 토목공사와 개발로 ‘공사판’이었던 서울은 역설적으로 건축가들에게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흰 도화지처럼 무한대의 꿈과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장이었습니다. 이 시대 최대 건축주는 국가권력이었고, 각종 대규모 사업을 도맡았던 ‘한국종합개발공사’의 김수근은 당대 대한민국에서 가장 명망 높은 건축가였습니다. 김현옥 시장은 김수근 건축가와 함께 여의도 개발의 청사진을 내놓습니다.
1968년 김수근이 발표한 ‘여의도 계획’에는 여의도 서쪽에 국회, 중앙에 고층 상업·업무지구, 동쪽에 시청·대법원 등을 배치하는 안이 들어 있습니다. 인상적인 점은 그가 주도해 건설했던 세운상가에 적용한 입체의 기능이 여의도에 담겼다는 것입니다. 그는 건물 사이 간선도로를 만들고 차도는 1층, 보행자 전용로는 2층으로 분리하여 설계했습니다. 보행자만 거닐 수 있는 공중 데크는 핵심 지점에 5개의 루프를 만들어 순환하게끔 했습니다. 뉴욕 맨하탄 하이라인 파크가 거대하게 확장한 모습을 상상하면 될까요.
이와 같은 여의도 개발안을 두고 여전히 ‘원대하고 시대를 앞서간 계획이다’, ‘현실성 없는 탁상공론이다’라는 평이 갈립니다. 결과적으로 김수근의 안은 두 가지 이유로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하나의 이유는 공사기한 20년에 1,000억 원의 예산이 소모되는, ‘감당 어려운’ 공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은 건물 한 채 올리는 데도 천억 원의 공사비는 우습게 쓰이지만, 계획이 수립된 1968년의 1인당 국민소득이 168달러에 불과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시대에 규모가 얼마나 큰 대공사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여의도를 가로지르는 광장을 만들어라’라는 지시 때문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이 직접 여의도 지도를 펼쳐놓고 빨간 선을 빗금을 그어 구획을 정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절대 권력의 지시에 끝없는 콘크리트로 가득한 공간이 ‘5·16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섬 중앙에 들어섭니다. 당장 내일 전쟁이 발발한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남북 사이가 일촉즉발이었던 때였습니다. 여의도에 광활한 광장을 지시한 큰 의도는 전시상황에서 비상비행장으로 사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하튼, 여의도를 두 쪽으로 나누는 거대한 광장의 등장에 김수근의 계획안은 들어설 곳이 없었습니다.
허허벌판에 들어선 초호화 아파트
한편 1970년 와우산 자락에 지어진 시민아파트 한 동이 무너져 33명의 사망자와 수십 명의 부상자를 낸, 이른바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으로 김 시장이 사퇴합니다. 신임 양택식 시장이 취임 직후 마주한 시 재정 상태는 그야말로 ‘빚더미’였습니다. 도심을 지나는 고가와 강남북을 잇는 다리들, 남산을 뚫는 터널 등 서울 곳곳에 벌여놓은 대규모 건설공사 때문이었습니다. 그해 8월 매일경제신문의 보도를 살펴보시죠.
텅텅 빈 곳간을 다시 채우기 위해 공원을 비롯한 시유지까지 전부 팔아버린 상황이었습니다. 공사비가 체불되고, 인력들에게 봉급도 못 줄 정도였다는 언론보도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양 시장은 재정 적자의 큰 요인이었던 ‘여의도’에서 재정을 다시 살릴 해답을 찾으려 합니다. 그는 홍익대 건축과 박병주 교수에게 의뢰해 ‘여의도 계획’을 실현 가능한 안으로 바꾸는데 집중했습니다. 1971년 새롭게 제시된 여의도 종합개발계획은 기존안을 180도 뒤집는 계획이었습니다. 광장을 중심으로 서쪽은 업무지구, 동쪽을 주거지구로 구분했고, 기존 계획을 전면 평면화 후 구획을 바둑판식으로 나누었습니다. 상업지구의 비중을 줄이고 택지지구는 늘려 아파트를 지어 분양하고, 이를 통한 수입을 꾀했습니다.
여의도 동쪽에 조성된 택지지구에 아파트 건축이 시작됩니다. 24개동, 1,596가구의 시범아파트는 ‘최초’의 수식어로 장식한 초밀도·초고층‧초호화 아파트였습니다. 도시공학계의 최고의 전문가들이 설계에 참여해 준공 전부터 ‘맨션아파트’, ‘고급아파트’라고 불렸습니다. 주거시설에는 처음으로 고속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고, 도시가스를 연결해 중앙 공급 냉난방이 가능하게끔 했는데 이 역시 국내 최초였습니다. 소형 평수 위주였던 기존 시민아파트와 다르게 20-40평대의 다양한 평형으로 구성했습니다.
시범아파트 분양 초기 시장의 반응은 차가웠습니다. 아파트 하나 우뚝 선 외딴 섬에 입주하고자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와우아파트 사건으로 ‘아파트’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오죽하면 양 시장이 선전물을 돌려가며 분양을 홍보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매스컴에 연이어 보도되는 고급 아파트의 모습과, 여의도는 중산층 이상이 모여 사는 동네라는 이미지가 형성되면서 분양도 차츰 활기를 찾습니다. 시범아파트를 필두로 여의도에는 각종 민간건설사가 아파트 건설에 뛰어들어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형성되게 됩니다.